내 집처럼 편안한 차, 카렌스
IMF 시절 패밀리카의 주역
초기엔 토요타 참고했었다

기아의 MPV이자 카렌스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겐 익숙하지만, 누군가에겐 낯선 이름이 되었다. 현재는 내수에서 2010년대에 자취를 감춰버리곤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한 때 대한민국 내수 시장에서도 카렌스가 주목받던 시기가 있었다. 어두웠던 IMF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모두가 힘들던 세기말에 빛처럼 나타났던 카렌스는 저렴한 유지비와 무난한 스타일, 다인승을 앞세워 시장에 전개되었다.
현대차에 흡수되고 난 후에 생산된 모델이지만, 의외로 카렌스 1세대는 기아의 독자 플랫폼인 세피아의 플랫폼을 사용한다. 당시 세피아의 플랫폼은 세피아 2, 슈마, 스펙트라, 스펙트라 윙 등 여러 차종과 함께 공유했던 기본기 좋은 플랫폼이었는데, 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목적이었는지 그 플랫폼을 MPV에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카렌스는 순수 국산 기술로 개발된 차종이었지만, 패키징은 토요타의 입섬을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측면에서 느껴지는 비율이나 분위기가 꽤 비슷한 것이 그 힌트다.
현대차에 물든 카렌스
페이스리프트로 이어진다
순수 기아의 기술로 개발된 카렌스는 얼마 되지 않아 밀레니엄 엠블렘을 장착하며 현대차의 물이 든다. 주인공은 바로 카렌스 2000 Di였다. 외관으로만 봐선 별다를 것 없이 라디에이터 그릴과 테일램프 그래픽 정도만 수정된 카렌스였지만, 엔진이 현대차의 2,000cc급 LPG 베타 엔진 사양으로 변경되었다. 이때 적용된 엔진이 추후 EF 쏘나타와 옵티마의 시리우스 LPG 엔진의 대체품으로 적용되며 내구성 좋은 택시 전용 엔진으로 소개되는 후문도 전해진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카렌스는 ‘2’ 라는 이름을 달고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플랫폼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외관의 디자인을 큰 폭으로 수정한 스킨 체인지 모델이었는데, 사이드 캐릭터 라인과 실내에 컬럼식 기어 레버가 장착된 것까지 초대 카렌스와 공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때 현대차의 D 엔진을 이용한 디젤 사양이 출시되었는데, 초기엔 카렌스 2 디젤로 판매되다가 법규 문제 탓에 엑스트렉이라는 별도의 모델로 변경되었다.
2세대 카렌스의 시작
벌크업으로 돌아왔다
카렌스 2와 엑스트렉으로 남아있던 순수 기아차의 플랫폼은 2세대 카렌스가 등장하며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1세대 카렌스가 소형차 세피아의 플랫폼을 이용한 것에 반해, 2세대 카렌스는 중형차 로체의 플랫폼으로 개발되었다. 여기서 무난한 디자인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데, IMF 시대에는 디자인보다 공간 활용도나 실용성이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열쇠였다면 2세대 카렌스가 출시된 당시는 디자인에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무난한 디자인으로 출시된 카렌스는 졸지에 밋밋한 디자인을 가진 재미 없는 MPV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그랜저 XG의 페이스리프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 바로 수출 사양과의 디자인 차별 문제가 불거졌다. 모난 부분 없이 부드럽게 디자인한 내수용 디자인과는 다르게 콘셉트카 멀티 S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살린 수출형의 디자인이 더 잘생겼다는 평가가 이어진 것이다. 이를 의식한 건지 기아는 부랴부랴 ‘뉴 페이스’라는 서브네임과 함께 카렌스의 연식 변경 모델을 출시했다. 뉴 페이스 카렌스가 차생을 마무리할 때쯤, 피터 슈라이어의 손길을 받아 호랑이 코 그릴을 잠시 적용받기도 했었다.
갑자기 유럽 향을 풍긴다
3세대 카렌스의 몰락
1세대와 2세대 모두 유럽과는 거리가 먼 동양의 향을 풍기던 카렌스는 씨드의 플랫폼을 이용해 개발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인지 3세대가 출시되면서 갑자기 유럽의 향을 풍기며 등장했다. 그렇지만 실내 공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A필러를 극단적으로 전면부에 가깝게 설계한 모습이었는데, 이는 실내 거주성을 확보하는 데에 이점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졸지에 3세대 카렌스를 ‘이도 저도 아닌 모양’으로 만들어버리는 데에 일조했다. 여기서 곡선을 가미한 전면부는 망둥어 같은 인상을 줘 졸지에 못생기고 인기 없는 차가 되었다.
아울러 당시 시장에 ‘범블비 카마로’와 같은 패밀리룩을 앞세워 나타난 강력한 경쟁자, 한국GM의 올란도의 판매량을 꺾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런 MPV는 스포티한 주행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유럽형 해치백으로 설계되어 탄탄한 하체를 자랑하는 씨드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아 승차감이 좋지 않다는 악평에 시달리는 수모도 겪는다.
1세대가 시대를 잘 파악한 패키징과 상품성으로 시장에 제대로 안착한 것과 다르게 올란도라는 강력한 경쟁자와 부족했던 상품성, 이도 저도 아닌 디자인과 특출난 것 없는 성능은 카렌스를 빠르게 단종의 길로 인도했다. 부진한 상품성을 개선하고자 페이스리프트를 한 차례 진행하긴 했으나, 섀시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개선할 수 없는 공간 부족 현상을 해결할 수 없었던 탓에 제대로 힘 한번 못 써보고 그 이름이 소멸하기에 이른다. 물론 당시 MPV 시장 자체가 SUV 수요로 대부분 이동해버린 탓에 올란도마저 쓸쓸히 그 자취를 감춰 내수 시장에 MPV는 씨가 말라버린다.
부를 수 없던 그 이름
4세대 카렌스 재출시
3세대 카렌스의 쓸쓸한 단종 이후로 좀처럼 카렌스라는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카렌스의 이름이 부활했다. 현대차의 개발도상국 전략형 차종인 스타게이저의 형제 차종으로 기획된 7인승 RV가 카렌스의 이름표를 달고 공개된 것이다. 2세대 니로와 비슷한 느낌의 전면부는 세련된 이미지를 풍겨 호평받았지만, 차체에 비해 크기가 작은 휠과 5세대 스포티지를 조각내어 짜맞춘 모양새의 후면부는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개도국 시장에선 꽤 인기 차종으로 급부상한 모양이다.
최근 대한민국 도로 위에 위장막을 두른 불명의 SUV 전기 테스트카가 포착되어 이슈였는데, 그 차가 바로 4세대 카렌스 페이스리프트의 순수 전기 사양이라고 한다. 최근 기아의 스타맵 시그니처를 적용한 모습이 위장막 너머로 엿보이는데, 어째서인지 내수 소비자에게 한국 출시 요청도 간혹 보이는 중이다. 모두의 기억 속 어딘가로 사라진 카렌스는 비록 내수 시장에서 만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하지만,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했던 동창처럼 항상 그 빈자리가 느껴져 언젠가는 내수 시장에 카렌스라는 이름을 다시 보는 날을 어렴풋이 그려보게 되는 자동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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